[미래의학 프론티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더 깊은 방법, 마음을 읽는 의학의 새로운 좌표 - 정신건강의학과 박선철 교수
같은 진단명 아래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고, 또 서로 다른 이유로 견뎌낸다. 박선철 교수는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임상과 철학, 정신의학의 경계를 오가며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로 다른 작업들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무엇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마음을 오래 바라보며 그는 오늘도 조용히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간다. Q. 정신건강의학과를 선택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한양대학교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스승님들의 가르침이 제 학문적관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임상강사 시절, 박용천 교수님(현 명예교수)께서 참여했던 「한국형 우울장애 진료지침」 개발 연구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것은 지금도 제게 큰 밑거름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울장애의 정신치료를 근거중심의학 관점에서 재정의하는 작업은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별로 시도되지 않았던 혁신적인 연구였습니다. 고려대학교 의대 이민수 교수님을 비롯한 국내 우울장애 분야의 선도적인 정신의학자들과의 교류는 제 학문적 역량과 태도의 중요한 기반이되었습니다. 한편, 작고하신 양병환 교수님께서 칼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 한글번역의 감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경희대학교 의대 송지영 교수님을 비롯한 8분의 정신의학자, 4분의 독문학자, 2분의 철학자가 4년 동안 매달렸던 방대하고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우울장애 진료지침 개발 작업이 제 연구의 폭을 넓혀주었다면, 「정신병리학 총론」 번역 작업은 제 연구를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Q. 교수님께서는 정신질환을 단순한 진단 기준만으로 바라보는 접근의 한계를 꾸준히 이야기해 오셨습니다. 현재 정신의학 진단체계에서 가장 고민하고 계신 지점은 무엇인가요? 미국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Diagnostic and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이하 DSM) 중심 진단체계는 정신의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진단 기준을 표준화함으로써 연구와 교육, 치료를 체계화할 수 있었고,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접근성도 크게 높아졌습니다. 실제로 해외 연수 과정에서 미국 연구자들과 논의하면서 저 역시 그 점을 다시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만 동시에 고민되는 부분은 이러한 진단체계가 지나치게 범주적접근에 머무를 경우 환자의 개별적 고통과 맥락을 충분히 담아내기 어 렵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우울장애는 DSM 기준상 동일한 진단명을 갖더라도 증상 조합이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자는 불면과불안을 중심으로 고통받고 또 다른 환자는 무기력과 자살사고가 핵심 증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진단명 아래 이질적인 상태들이하나의 범주 안에 함께 포함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저는 앞으로의 정신의학이 진단과 증상, 개인의 삶의 맥락을 함께 통합적으로 이해하는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실용적 진단체계의 장점은유지하되, 인간 이해라는 정신의학의 본질을 끝내 놓치지 않아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Q. 교수님께서는 우울장애의 ‘증상 네트워크 분석’과 개인맞춤형 치료연구를 활발히 하고 계십니다. 해당 연구가 기존 우울장애 진단·치료방식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현행 우울장애 진단방식은 여러 증상 중 일정 개수 이상 있으면 하나의 질병범주로 간주하는 방식입니다. 반면 증상 네트워크 분석은 우울장애를 여러 증상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는 네트워크 구조로 이해하려는 접근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에서는 불면이 핵심증상으로 작용하면서 피로, 집중력 저하, 우울감으로 이어질 수 있고,또 다른 환자에서는 죄책감이나 자살사고가 중심이 되어 전체 증상을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즉, 모든 환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하기보다 각 환자에게서 중심적으로 작동하는 증상을 개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에는 머신러닝 기반 접근을 활용해 우울장애의이질성을 보다 정교하게 포착해 실제 임상현장을 더욱 충실히 반영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하려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진단 명 중심의 획일적인 치료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증상 구조와 특성에 기반한 보다 정밀한 정신의학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Q. 하버드 의대 협력병원인 매사추세츠종합병원 연수 기간 동안 연구자들과 활발한 공동연구를 진행하셨습니다. 해외 연구 현장에서 가장크게 느끼신 점이나 연구자로서의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2024년부터 2025년까지 하버드의대 협력병원인 매사추세츠종합병원 도튼 패밀리 양극성장애 치료혁신센터(Dauten Family Center forBipolarTreatment Innovation)에서 연수하면서, 앤드류 니렌버그 교수와마수드 카말리 교수 등 기분장애 분야에서 가장 선도적인 연구자들과 함께연구하고 토론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미국연구자들이 생각보다 훨씬 실용적인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었습니다.저는 오랫동안 정신의학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놓치고 지나치게진단기준 중심으로만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왔습니다. 그런데 현지연구자들과 논의하면서 DSM과 같은 단순화된 체계가 있었기에 정신의학이지금처럼 발전하고 더 많은 환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점을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 이후 저 역시 연구를 바라보는 태도가 조금달라졌습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동시에실제 임상 현장과 사회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 역시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신의학 역시 ‘본질’과 ‘실용’사이의 균형 위에서 발전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Q. 교수님께서는 DSM 중심 진단체계의 한계를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그 체계가 정신의학 발전에 기여한 부분 역시 중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본질’과 ‘실용’ 사이에서 현재 정신의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정신의학이 본질과 실용 중 어느 한쪽만 선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질만 강조하면 정신의학은 지나치게 철학적이 되어 실제 임상에서 활용되기 어려워질 수 있고, 반대로 실용만 강조하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DSM은 분명 정신의학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진단기준을 표준화하고 연구 가능성을 높였으며,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접근성을 향상시켰습니다.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결국 진단 기준이라는 언어만으로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환자의 삶의 가치, 지나온 여정, 관계 속 맥락 등도 분명 중요할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전 분야에 걸쳐 많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만큼, 정신의학 역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인공지능을 통해 정신의학의 실용성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될 것입니다. 진단과 평가, 약물 선택과 치료반응 예측 등 많은 과정이 훨씬 더 정교해질 것입니다. 정신의학은 여전히 ‘병적 상태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학술적 질문이면서 동시에 임상적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신의학 역시 인간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보다, 인간을 끝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인식론적 겸손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최근 국제 정신건강 분야 주요 학술지의 부편집위원으로 선임되시는 등 국제 학술 활동도 활발히 이어가고 계십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한국 정신의학 연구의 경쟁력과 앞으로의 가능성은 무엇인가요? 최근에는 ‘코리아’라는 이름 자체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실감합니다. 저는 Psychiatry Investigation, Acta Neuropsychiatrica, International Journal of Mental Health and Addiction 등 SCI-E 등재 국제학술지에서 부편집인으로 위촉되어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 의학연구자에 대한 신뢰도 향상이 가장 큰 요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 의학연구자들이라면 우수한 연구역량과 윤리태도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기에 제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정신의학 연구의 가장 큰 강점은 높은 학문적 역동성과 빠른 변화에 대한 민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정신건강 문제 역시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쟁, 고립, 사회적 압박, 자살 등 현상은 단순히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세계가 함께 고민하게 될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한국 정신의학이 단순히 해외 연구를 따라가는 수준을 넘어 사회문화적 맥락과 실제 임상 경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시아 정신의학의 특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한 연구는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Q. 긴 시간이 걸리는 연구를 이어가다 보면 ‘이건 꼭 해내고 싶다’는 순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 그런 연구는 무엇인가요? 한번은 제가 연구라는 활동을 통해 이뤄낸 논문이라는 결과물들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쓴 논문이나 교과서 중 다음 학문세대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 편이나 될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논문과 교과서를 썼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결과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칼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과 에밀 크레펠린의 「정신의학」 번역의 감수 작업은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하지만, 한국정신의학의 기초를 건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야 하듯 꼭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향력이 큰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출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영역’에서 연구결과물을 내려고 합니다. 제가 정신병리학 고전의 한글번역이나 북한 정신의학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정신병리학 고전 한 편을 번역하고 있어, 언젠가 그 번역본으로 다시 한 번 인사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Q. 연구와 진료, 교육, 저술 활동까지 폭넓게 이어가고 계십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게 만드는 교수님만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제가 가진 몇 안 되는 재주는 책상에 오래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글을 쓰게 하는 동기는 누군가가 언젠가는 읽어주었으면 하는 욕망이라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한 번은 제 연구 활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쩌면 내가 그간 끊임없이 의미 없는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허망함에 잠시 빠졌던 적도 있었습니다. 연구라는 일이 결국은 대부분 잊혀지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연구자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제 연구가 의미 있는 결과를 낳았을 때 한양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동문 선후배님들께서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해주시고 기뻐해주셨던 것이 제게는 큰 응원과 지지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제 연구가 더 이상 저만의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제 욕심에서 시작한 연구이지만 그 결과가 한양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의 브랜드파워를 높이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논문이라는 것이 대부분 세간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 연구 활동의 독창성이 한국정신의학의 기본골격을 구성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작은 벽돌 하나쯤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연구라는 것을 놓지 않고 지속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끝내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존재이기에, 연구 역시 완결이라기보다 끊임없는 접근의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한양대학교병원을 찾는 환자분들과 의료진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한양대학교 구리병원을 찾는 환자분들께는 먼저, 병원을 찾은 것 자체가 이미 중요한 한 걸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온다는 것은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더 이상 혼자 견디지 않겠다는 결심에 가깝습니다. 저는 환자를 진단명으로만 보지 않으려 합니다. 우울장애, 불안장애라는 이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분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고, 왜 지금 이런 고통 앞에 서 계신가’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진료실에서 제가 끝까지 지키고 싶은 태도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병명보다 크고, 증상보다 깊습니다. 어쩌면 정신의학은 결국 한 인간을 끝까지 단정하지 않으려는 노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료진에게도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때로 지치고, 반복적이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통을 쉽게 단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의료가 마지막까지 잃지 말아야 할 품위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피터 쉐퍼의 희곡 「아마데우스」 중 한 대사를 이용해서 인터뷰를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하루하루가 ‘위대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위대한 이야기’로 채워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