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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모로의 생애와 위암 치료의 역사

글. 박찬혁 교수 한양대학교구리병원 소화기내과

상징주의 운동의 선구자, 귀스타브 모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성경에서 소재를 가져와 환상적이고 신비한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는 당시 서양 미술의 주류였던 사실주의,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상징주의, 표현주의로 이어지는 ‘주관적인 표현 중심의 미술’을 선보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주피터와 세멜레> 등이 있다. 그는 일흔을 앞둔 1895년 자신의 집을 미술관으로 개조하며 인생을 정리했고, 일흔 둘이었던 1898년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

귀스타브 모로의 일생

귀스타브 모로(1826~1898)는 파리 건축가인 아버지와 뛰어난 음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1826년에 태어났다. 그가 15세가 되던 해에 방문한 이탈리아에서 예술에 대한 사랑을 싹틔우기 시작하였고, 18세 때 피코의 지도하에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테오도르 샤세리오와 들라크루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를 그려 1864년 파리의 살롱전에서 메달을 수상했고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그는 주로 그리스 로마 신화 혹은 성경 속에서 작품의 주제를 찾았다. 생애 동안 8,000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으며, 20세기 초 벨기에 상징주의의 선두그룹인 오딜롱 르동과 장 델비유에 영향을 주었다.

모로는 1891년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가 되었고, 앙리 마티스, 조르주 루오 등 여러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미술사의 과도기였던 19세기 후반에, ‘객관적인 묘사 중심의 미술’인 사실주의·인상주의에서, ‘주관적인 표현 중심의 미술’인 상징주의·초현실주의로 이행되는 다리 역할을 했던 프랑스 만남화가로, 상징주의의 선구자로 불린다. 말년인 1895년에 파리의 집을 미술관으로 개조하여 자기 기록과 작품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72세가 된 1898년에 위암으로 사망하여 부모의 무덤이 있는 파리의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혔다. 모로의 집을 개조한 모로 미술관은 1902년에 공식적인 국가의 미술관이 되었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94 제우스와 세밀레 1895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94>(좌),  <제우스와 세밀레 1895>(우)

위암 진단과 치료의 역사

위암은 기원전 1600년경에 씌어진 에베르스 파피루스(Ebers papyrus) 문서에 처음으로 기술되었고, 기원후 2세기경 갈렌과 관련된 히포크라테스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당시에는 암이 어떤 질병인지 잘 알지 못했고 치료는 물론 진단조차도 쉽지 않았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조차도 1821년 사망하기 전 2년 간 복통과 구토로 고통을 받았으나 생전에는 병명을 알지 못하였소화기내과다가, 사망 후 부검을 통해서 위암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위암 수술은 1879년에 유명한 프랑스 외과의사인 줄레 에밀 페안에 의해 집도되나, 불행히도 환자는 수술 후 5일째 사망했다. 1년 후인 1880년 루드비크 리디기에르가 위암 수술을 집도했으나 환자는 수술 당일 밤에 사망했다. 이후, 1881년에 독일의 외과의사인 테오도르 빌로트가 처음으로 위암 수술을 성공하는데, 환자는 위를 부분 절제하고 남아있는 위와 십이지장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은 후 26일만에 퇴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4개월만에 위암이 재발하여 사망하게 되었다. 위 전체를 절제하고 식도와 소장을 연결하는 수술법인 위 전절제술은 1897년에 칼 슐래터에 의해 처음으로 성공하게 되고, 이후 위암의 여러 수술 방법은 20세기에 전 세계로 널리 보급되었다.

위암 수술법의 발전과 함께 위 내부를 관찰하는 검사 방법 역시 19~20세기에 걸쳐 발전했는데, 이는 1868년 독일의 쿠스마울이 지름 1.3cm, 길이 47cm의 금속관을 이용하여 위 점막을 관찰하는 위경(Gastroscope)을 개발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1950년경부터 위경 대신에 위 내면을 촬영하는 소형 카메라인 위카메라(Gastric camera)가 개발되었고, 1963년에는 가느다란 유리 섬유를 이용한 위파이버스코프(Gastric fiberscope)를 거쳐, 현재는 위 내부 영상을 전기신호로 바꾸어 모니터로 전달하는 내시경 기기가 널리 쓰이고 있다.

앞서, 테오도르 빌로트와 칼 슐래터는 각각 세계 최초로 위 부분절제술, 위 전절제술을 성공적으로 집도했음에도 완치시키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당시 진단 기술의 한계로 위암의 조기 진단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귀스타브 모로는 위암 수술이 널리 보급되기 전인 1898년에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모로가 위암 수술을 받았는지 여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수술을 받았다 하더라도 위암이 완치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기술의 발달로, 위암의 조기 진단 비율과 완치 비율이 점점 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40세 이상의 국민에게 2년마다 한 번씩 위내시경 검사 혹은 위장조영검사로 위암검진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위내시경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을 경우 위암사망률이 감소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아직까지 위암은 우리나라에서 발병률이 매우 높은 암종이고 초기에는 증상이 없어 진단이 늦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정기적인 검진을 통하여 조기에 발견한다면 수술적 치료를 통해 대부분 완치할 수가 있다. 아울러, 조기 위암 중에서 림프절 전이가 없는 경우에는 수술이 아닌 내시경절제술 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위암 증상이 없더라도 정기적으로 위암 검진이 필요하다.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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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기내과 - 박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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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 #위 부분절제술 , #위 전절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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